[기고] 기억 되어야 할 6·25 학도병의 헌신
숱한 피눈물의 역사를 안고 흐르는 한강 물이 보이는 강변 둑에 서 있는 학도의용군 충혼비는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1950년 6월25일, 그날 이후 서울 시내의 남녀 중학교(6년제)는 거의 휴교 상태가 됐다. 모든 수업은 중단됐고 상급학년 학생들은 목총을 들고 ‘학교사수’라는 구호 아래 군사훈련을 받는 학도호국단 조직이 발동했다. 대한민국 건국 채 2년이 되기 전 북한의 김일성 일당이 남한을 공산화하려고 일으킨 전쟁에 맞서 학생들도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하는 데 일조했다. 반공에서 멸공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하게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제창한 국가 지도자는 1949년 4월22일 남녀 중등학교와 대학에 학도호국단을 결성, 예비역 장교들을 배치 매주 1시간씩 교련이란 과목으로 기초 군사교육을 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예비역인 장교들은 곧바로 현역으로 복귀하여 전투부대에 배치됐다. 또한 학도병 지원자들은 실전훈련도 받지 못한 채 전투부대원으로 군에 배속되었다. 평소 학교에서 익힌 제식훈련과 집총훈련이 학도병들이 받은 군사 훈련의 전부였다. 살펴보면 학도병들은 전쟁 발발 후 1951년 4월까지 전·후방에서 전투에 참여하거나, 공비소탕·치안유지·간호활동·선무공작 등에 참가해 군과 경찰 업무를 도왔다. 전쟁 발발 직후인 6월26일과 27일 이틀 동안 서울을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인민군 앞에서 누구라도 최악의 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6월28일 서울에는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이 밀어닥치기 시작했고, 각 학교에는 붉은 완장을 찬 공산주의자들이 나타났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인민군의 총알받이로 잡혀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우선 서울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지만 끊어진 한강 다리 때문에 인민군을 피해 남쪽으로 움직인다는 건 너무 위험하고 어려웠다. 필자도 서울 탈출 기회를 놓쳐 고생하다 7월5일에야 구사일생으로 한강을 건너는 데 성공해 도보로 남행을 서둘렀으나 당시 인민군의 선두는 이미 대전을 지나고 있었다. 필자는 할 수 없이 야간에 수원을 지나 오산 동쪽 용안이라는 곳 인근의 깊은 산으로 피신했다. 산중에는 이미 피란 온 20여명의 학생이 숨어 있었다. 우리는 산속에 숨어 미군의 폭격, 서해상의 함포사격 등 고막을 찢는 소리를 들으면서 국군의 진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학도의용대’란 명칭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이 반격에 성공하면서 도망치는 인민군 패잔병을 생포하고 주민을 대피시키는 등의 역할을 했었다. 그러다 낙동강에서 북진하는 국군에 합류 군복과 소총 한 자루, 수류탄 몇 개를 받고 전투에 참여했다. 학도병으로 국군에 편입된 것이다.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도 못한 채 계급장이나 군번도 없이 전투에 참여한 학도병 전사자와 실종자, 부상자가 속출했으며 포로로 잡혔다 처형되는 일도 있었다. 마침내 9월15일 아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수도 서울을 3개월 만에 수복하는 환희와 감격도 누렸다. 국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을 하고 있을 즈음 문교부 장관은 전세가 호전되었으니 학도병은 학교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본인이 원하면 현역병으로 현지 입대도 가능했다. 이렇게 생존한 학도병 대부분이 귀가하거나 학교로 돌아갔다. 학도병이란 학생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한 병사다. 이들은 어린 나이에도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며 헌신했다. 6·25 한국전쟁 73주년을 맞아 이들의 공헌과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고 존중해야 할 것이다. 학도병들은 6·25 전사의 영웅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학도병 기억 학도병 지원자들 인민군 패잔병 남녀 중등학교